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 르누아르 (문단 편집) == 생애 == 1894년 9월 15일,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꽤 늦둥이라서 피에르는 아들이 감독으로 활동하는걸 보지 못했다.] 어렸을 적부터 그림과 문학에 재능을 보였는데, 그래서인지, 어렸을 땐 화가를 꿈꾸었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에 비행사로 종군하게 되었는데, 기계설계나 정비를 배우며 자연스레 카메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 본인은 미국 영화를 좋아한데다 아버지 모델이기도 했던 첫번째 부인 카트린 에슬랭Catherine Hessling (1890~1979)을 스타로 만들어주고 싶어서 영화감독이 되었다는 발언을 했다. 진담인지는 불명. 카트린은 실제로 장 르누아르 초기작 주역이기도 했다.] 1924년 영화 〈물의 딸〉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한 이후, 혁신적인 작품들을 내놓으며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특히 1939년 [[게임의 규칙]]은 전세계 모든 영화를 통틀어 평론가들에게 20세기 최고의 영화 Top 10에 항상 꼽힐 만큼 혁신적인 촬영 기법과 연출 기법을 동시에 사용한 걸작으로 꼽힌다. 허나 이때 당시엔 크게 주목받지 못해 고생을 했는데, 특히 자금난에 시달린 적이 많아, 종종 부족한 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 아버지 그림을 많이 팔았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1941년,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떠나 [* 아예 시민권을 획득해서 이 시기부터 프랑스에 거주하지 않았다. (다만 국적은 복수국적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엔 영화 촬영 및 인터뷰 목적으로 방문했다고.], 향후 얼마간 [[할리우드]]에서 다수의 영어 작품들을 내놓게 되었다. 이 시절은 그렇게 유명하진 않지만 [[남부 고딕]]에 관심을 기울여 늪지의 물 같은 수작들을 내놓기도 한다. 이후 [[앙드레 바쟁]]을 위시한 [[영화 평론가]]들로부터 재평가 받아 '프랑스 영화의 선구자'라는 상찬을 받으며, 다시 유럽 영화계로 복귀하게 되었다. 1960년대엔 [[자크 리베트]]가 방송국에서 인터뷰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이 역시 상당히 중요한 자료로 남아있다. 영화를 만들면서도 타 분야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특히 아버지에 대한 저술과 증언을 많이 남겨서[* 때문에 화가 르누아르를 연구하려면 감독 르누아르가 남긴 자료를 무조건 거치게 돼있다.], 향후 프랑스 미술계에 큰 보탬을 주었다. 1979년 2월 12일, [[캘리포니아]]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